이상봉 동문님의 ‘교회당 새벽 종소리’에 담겨진 함축된 의미를 감사하면서 몇자 토를 달까 합니다.
우선, 서울에서 새벽마다 들어야 했던 교회당 종소리는 이제 사라진 지 오래 되었습니다. 한국도 소음 공해에 민감해져 그것이 법으로 금지 된지 오랩니다만, 글쎄요, 시골가면 아직도 그러고 있는 교회가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정말로 대단한 것은 석유 일로 회교 국가를 출장 갈 때나 몇 년 머물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의 저의 경험입니다. 새벽 다섯 시쯤이면 동네 어귀나 시내 곳곳에 있는 확성기를 타고 ‘코란’을 읽어대는 소리로 잠을 설치기가 일쑤였는데 이것은 공해 정도가 아니라 ‘음성 기관총’을 동네에 휘갈기는 폭력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코란에도 잠언 구절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동문님의 잠언 27장 구절은 이런 면에서 여러 가지 시사하는 바가 있기는 합니다. 때로 성경구절을 곧이곧대로 파 헤치다가 ‘자가당착’에 빠지는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성경 구절은 은유의 말씀들이 너무 많아 줄과 줄 사이의 공백을 유심히 읽으라는 말도 있습니다.
차제에 제가 경험하고 있는 ‘난제 중의 난제’ 하나를 얘기할까 합니다. 아울러 이에 대한 이상봉님의 예리한 필봉도 부탁 드립니다.
저의 친척 중에 ‘여호와의 증인’ 인 가족이 하나 있어 그들의 종교관 때문에 얼굴 보기 힘든 식구들이 있습니다. 다름 아니고 그들은 교리상 ‘예수의 탄생’ 이외의 어떤 탄생일도 ‘기념’하거나 ‘축하’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가 친척의 생일 파티나 돐, 심지어 성탄절이나 설 등 특별한 날을 기리기 위해 모이는 행위에 낄 수 없는 그들 나름대로의 교리가 견고 합니다.
친척 모임의 보편적인 구실이 위에 열거한 경우들이고 보니 그 가족과의 만남이 자연히 소원 해 지고, 그러다 보니 ‘이산가족’이 한반도 남북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얼마 전엔가 그쪽 조카 둘과 몇몇 친척이 어느 ‘평일 날’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친척 중 하나가 이때다 하고 그들과 ‘담판’을 시작 했습니다. 조카들은 30대 젊은 친구들이니 큰 부담 없이 말꼬를 튼 것 이겠지요.
“야 너희들, 일가 친척 모일 때 마다 여호와 증인은 이런 때 못 간다, 저런 때 못 간다 하며 초대에 응하지 않는데 이거 너무 한 거 아니니? 여호와의 증인은 이렇게 해서 친척들에게 서운함을 주고, 가슴에 못을 박아도 되는 거니?”
“ 예 우리도 그건 알아요.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뿐 이예요”
“천주교가 한국사람 제사 지내는 것을 허용하고 있는 것처럼 너희들도 친척들 생일 같은 날 모임에는 어느 정도 여유를 주어야 되는 거 아냐?”
“ 예 우리도 그건 알아요.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뿐 이예요”
대화는 점점 더 점입가경으로 들어 갔습니다.
“그럼 너희들 생일날이나 너희 부모 생신 날 아무 특별한 ‘행사’ 없이 그냥 지내니?”
“예, 어느 누구도 ‘생일’이라는걸 의식해서 특별한 차례도, ‘Happy Birthday!’같은 말의 표현도 안 해요. 우리에겐 오로지 예수가 탄생한 날만이 유일하게 축하 해야 할 ‘생일’ 이예요”
그게 성경 어느 구절이냐고 물으려다 아차 내가 지금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가 에 생각이 미치자 입을 꽉 다물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대화는 친척들이 모처럼 모인 자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topic이기도 합니다.
“ 여호와의 증인은 시도 때도 없이 아무 집 문을 두드리고 ‘전도’ 하는데 문전 박대를 많이 당하지 않니. 그렇게 ‘냉대’를 당하면서도 필사적으로 하는 이유가 무어니?”
“ 예 우리도 그건 알아요. 99%는 문전박대 당할 것을 생각하며, 그것을 당연시 하면서 방문 합니다. 우리는 그저 성경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뿐 이예요. 성경에 꼭 몇 집은 방문하여 전도 하라고 쓰여있어요”
이쯤 되니 얘기가 좀 비약 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문전 박대’ 당하는 것 자체가 너희들 ‘고가 점수’를 높여줘 너희들 식의 ‘어느 특정한 숫자로 한정 된 천국 행 기차표’ 수혜자 대열에 끼고자 하는 것이냐? 그렇담 너희들은 너무 selfish 한 것 아니냐? 남이사 어찌 느끼던 자기만족을 얻고자 함 아니냐.”
“아니, 그건 아니에요. 우리는 그저 성경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뿐 이에요”
끝이 없는 평행선.. 이것은 마치 철로의 두 레일이 서로 만날 수 없는 운명 같습니다.
우리들 눈에는 두 조카가, 두 조카들 눈에는 우리가 그저 ‘가련한 방황 자’에 불과 한 것이겠지요. 아니, 그것은 불교에 심취하고 있는 또 다른 친척에게도 마찬가지 일것 입니다. 만일 셋이 모여 얘기 했더라면 세가지 경우수의 ‘불쌍한 둘’과 ‘옳게 가는 나’만 있을 뿐입니다.
누군가의 말이 떠 오릅니다.
누가 맞고 틀리고가 아니라 우리는 그저 서로 다를 뿐이라는.
마지막으로 두 조카가 한 말이 여운을 남깁니다.
“우리가 기꺼이 응할 수 없는 날만 아니라면 언제라도 와 뵙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한마디 조크를 던졌습니다.
"이제 보니 젊은 너희들이 너희 부모보다 훨씬 골수구나. 반성의 여지가 전혀 없는!”
조크를 던지는 저나 여호와 조카나 친척들이 전부 와! 하고 웃으면서 헤어졌습니다. 아울러 마구 몰아 세우는 '친척 어른들'에게 골수 여호와의 증인스럽지 않았던 두 젊은 조카의 참을성에 내심 감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이상봉님, 교회당의 새벽 종소리에 너무 민감하지 마십시오. 산사에 가면 마이크에서 흘러 나오는 독경소리에 민감하지 마십시오. 길을 가다 뜬금없이 예수를 믿으라고 아우성치는 기독교인에게 너 때문에 믿을 맘 가진 사람 돌아 서겠다 하지 마십시오. 통성기도 시켜놓고 마이크 붙잡고 오히려 각자의 기도를 방해 하는 목사님한테 불평하지 마십시오. 다 그게 성경에 있는데 그저 해석의 차이라고 편하게 생각 하십시다.
문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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